아름다움

글 : Marie NDiaye
사진 촬영: Charles Negre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의 변화하는 여정에 관한 주관적인 성찰.
프랑스 소설가이자 극작가
마리 은디아이 (Marie Ndiaye) 글

어릴 때부터 나는 변신이라는 개념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떻게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아이이자 어린 소녀였던 나는 스스로를 아름답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존재라고 느꼈다. 흥미롭지 않은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아름답지 않다는 것, 그저 예쁘지 않다는 사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예뻐질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꺼이 예쁜 시체가 되고 싶었다. 물론 죽고 나면 세상이 말하는 아름다움을 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그다지 예쁘지 않다는 평가는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낙인처럼 느껴졌다.

1970년대, 젊은 여성이었던 우리 엄마는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녀에게 메이크업은, 당시에는 아직 가부장제라고 불리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복종의 한 형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늘 메이크업을 사랑했다. 립스틱은 내가 너무 크다고 여겼던 입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80년대에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내 큰 입술이 저속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내 입술 위의 극단적인 빨간색은 해방의 한 형태였다. 내 입술이 큰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나는 그 붉은 색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렬하게 드러냈다.

나는 더 이상 내 입술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며 색을 입혔다. 그 화려한 아름다움과 풍부한 볼륨감을 드러내기 위해 입술을 강렬한 빨간색으로 물들였다. 빨간색이 내 입술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든다고 확신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떤 것에도 모욕감을 느끼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때로는 내가 메이크업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걸 나도 안다. 아무리 옅더라도 메이크업 없이는 나는 집을 나서지 않는다. 나의 맨얼굴을 이웃에게 드러내 보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름도 모르는 이웃의 의견이나 평가 따위는 전혀 신경 쓸 이유는 없는데. 사실 그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는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건물을 나설 때마다 메이크업을 하는 걸까. 왜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서 립스틱을 바를까. 왜 출산 직후 가족과 친구들을 기다리며 파운데이션과 아이라이너를 발랐을까. 피곤해 보이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도 나는 맨 얼굴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몸이 겪어낸 고단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얼굴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메이크업은 필수적인 갑옷이자 보호막이다. 매일 아침 이 무쇠 갑옷을 입는 일은 의무이자 즐거움이며,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립스틱이다. 극단적이고 지배적인 빨간색. 나는 전투를 준비하듯 메이크업을 하고, 그것은 내가 다루는 무기가 된다. 메이크업은 이 세상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법이자 전략이며, 동시에 부드럽게 나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온화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내가 립스틱을 바르지 않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립스틱은 나의 일부이자, 영혼이고 심장이다. 그 빨간색은 나를 강하게 만들고 자유롭게 했으며, 내 입술과 얼굴, 그리고 나 자신을 받아들이게 했다. 나는 그 향을 사랑한다. 립스틱은 달콤한 향을 지니고, 파운데이션은 더 거칠고 날것에 가까운 향을 지닌다. 그 향 또한 깊이 사랑한다.

나는 배우가 아니지만, 매일 아침 메이크업으로 또 하나의 역할을 입는다. 날마다 기분에 따라 빨간색은 물론 여러 색조의 아이섀도우, 블러셔, 파우더를 선택하면서 만족을 느낀다. 마음이 어두운 날에는 과장된 컬러를 고른다. 그 강렬함이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것처럼. 반대로 기분이 밝은 날에는, 물론 상대적인 의미이지만, 절제된 컬러만으로 충분하다. 메이크업을 하는 동안 나는 하나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알고 있던 나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